나는 왜 살아남았는가_2
알코올에 가려진 아버지
- 가족을 무너뜨린 중독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세상 앞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중독은 우리 가족 전체를 조금씩 무너뜨렸다.
처음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마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술이 아버지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를 다치게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두려움과 인내 사이에서 살아갔다.
매일 저녁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만 들어도
집 안 전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고성, 폭력, 물건 부수는 소리, 울음소리…
이 모든 게 우리 집의 일상이었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다.
이게 이상한 건지, 모두가 그런 건지 몰랐다.
단지 그 상황을 견디는 법을 터득할 뿐이었다.
조용히, 눈치 보며, 숨죽이며 사는 법.
하지만 중독은 단지 아버지만 망가뜨린 것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 전체를 조용히 무너뜨렸다.
엄마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었고,
나는 세상과 단절된 채 자라났다.
말을 줄이고, 감정을 숨기고, 관계를 피하는 아이.
그게 나였다.
사람들은 중독을 ‘개인의 문제’라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족 전체를 병들게 하는 고통이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되풀이되는 두려움, 그리고 사랑에 대한 불신.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고통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는 어쩌면 사랑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표현할 줄 몰랐고, 감정을 술로만 억누른 채 살아왔던 것일지도.
지금 나는 아동 관련 기관에서 일 하는데,
중독의 그림자, 또는 이혼으로 힘든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를 마주할 때가 있다.
그때 아이의 힘없고 생기를 잃은 눈빛을 보면
과거의 '나'가 떠오른다.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너는 혼자서 너무 잘 버텼어.”
이 말을 과거의 나에게도,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계속 전하고 싶다.
-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족을 두려움 속에 살게 했고,
엄마를 울리고, 나를 침묵 속에 가둔 사람이었다.
이해라는 말은, 너무 관대해 보였고
너무 쉽게 그의 잘못을 덮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원망했다.
분노했지만, 말로 꺼내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두려움 그 자체였다.
술 냄새, 고함 소리, 주먹 쥔 손…
아버지라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조여왔다.
나는 그가 밉고, 싫고, 괴로웠다.
그런데, 상담을 공부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상담 책 속에서, 강의 속에서
내 아버지와 너무 닮은 사람들을 만났다.
감정을 표현할 줄 몰랐던 사람,
자신도 상처받은 채 어른이 된 사람.
아버지도 그런 사람이었을까?
그는 단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주름진 얼굴을 떠올리면
그 안에 후회와 외로움이 숨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이해하는 순간,
나의 분노도, 나의 상처도
작아지는 것 같아 두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해가 용서가 되진 않아도,
이해가 나를 가볍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
나는 여전히 당신을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은 문득 이렇게 말해봅니다.
“당신도 아팠겠지요.
나는 이제, 당신과 같은 길을 걷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아픔을 듣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말이 아버지에게 닿을지 모르지만,
이해하지 않던 그 시간을
이제는 내 치유의 한 조각으로 삼고 싶습니다.
-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나요?”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사랑할 틈이 없었다.
그의 손은 위협이었고,
그의 말은 고성이었고,
그의 얼굴은 늘 술에 젖어 있었다.
엄마를 때리고,
아이인 나에게 두려움을 안기고,
가정을 무너뜨렸던 사람.
내 삶에 '아버지'라는 단어는
언제나 ‘공포’와 나란히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릴 때의 나는
그를 여전히 사랑하려 애썼다.
그게 더 아프고, 더 혼란스러웠다.
상담을 배우면서,
나는 수없이 ‘용서’라는 단어를 만났다.
하지만
용서가 꼭 의무는 아니라는 걸
배우는 데는 오래 걸렸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그를 미워한 나를 죄책감으로 덮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를 조금씩 놓아주는 일이
내가 나로 살아가는 길이라는 것.
그를 끌어안는 것도 아니고,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이제는 그가 내 마음을 지배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용서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용서란,
상대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지만,
어제보다는
조금 더 아버지를 향해
덜 단단해진 마음으로 서 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쓰며 말한다.
“아버지,
당신을 미워하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썼어요.
이제 그 힘을
나를 사랑하는 데 쓰고 싶어요.”
나는 왜 살아남았는가_3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