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

나는 왜 살아남았는가_3

by 안임수 2025. 8. 5.
반응형

출처: 픽사베이

 

무너진 가정, 남겨진 아이

  • 어린 나는 어떻게 살았나나는 늘 또래 아이들과 조금 달랐다.

나는 늘 또래 아이들과 조금 달랐다.

또래 친구들보다는 한참 나이 많은 언니들과 대화하는 게 더 편했다.
어린 나이에 어른스러운 말투, 어른스러운 표정,
그리고 어른처럼 조용하고 눈치 빠른 아이.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물었다.
“너 왜 이렇게 조용해?”
“너 눈이 왜 이렇게 슬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눈이 슬퍼 보인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집에서부터 따라왔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고함을 지르는 날이면
엄마는 또 울고,
나는 또 조용히 웅크려야 했다.

어린 나는
홍수처럼 넘실대는 냇물에 양초를 띄우며 소원을 빌었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나는 기도했다.
“오늘은 아버지가 술을 먹지 않고 집에 오게 해 주세요…”

어린 마음에
내 기도를 하나님이 더 잘 들으실까 싶어서
아주 날카로운 자갈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 날도 있었다.
내 고통을 보여드리면 하나님도 감동하지 않으실까 하는
애틋하고도 절실한 믿음이었다.

 

나는 그렇게
항상 어둡고 무거운 인생 속에서 ‘하루를 견디는 아이’로 살았다.

그 시절 나의 소원은 단순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하지 않고 돌아오는 것.
엄마가 맞지 않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괜찮아, 너 참 잘 버텼다”라고 안아주는 것.

 

그런 삶을 살다가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객지로 나와 독립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세상에서
나는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택했다.
일찍 철들었다는 말은 누구에게는 칭찬이지만
나에게는 살기 위한 무기였다.

 

20년이 지난 후,
중학교 만났는데, 

“그때 너, 참 우울해 보였어.
그런데 지금은 많이 밝아졌네.”

학창 시절의 내 모습에 대해  말해 나는 웃었다.

 

나도 안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살아 있고,
그때보다 지금이 더 나다워졌다는 걸.

하지만 그 어두운 시절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나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슬펐지만, 나는 그 어둠을 딛고 서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 외로움과 생존

나는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났다.
그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숨을 쉬고 싶었다.

하지만 떠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사라지진 않았다.

어딘가로 가는 길에도,
식사를 마친 밤에도,
감기에 걸려 누워 있는 오후에도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있을 텐데…”
“괜찮을까. 또 울고 있진 않을까.”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그 집 안에 있었다.
나의 뿌리는 그곳이었다.
그 불행한 집,
상처투성이였지만 나의 시작이기도 했던 곳.

그렇게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밥을 챙기고, 일터에 나가고, 사람들에게 웃으며 말하고,
그러면서도 늘 어딘가 한편이비어 있었다.

 

그런 어느 날,
감기 몸살이 심하게 와서
고열에 시달리며 몇 날을 앓고 있었다.
정신이 흐려질 정도로 아팠던 그때,
전화가 울렸다.

"괜찮아? 잘 지내냐?"
…아버지였다.

너무 놀라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는 아버지,
나를 걱정한다고 말한 적 없던 그 사람.

나는 울음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 짧은 대화가 끝나고
나는 조용히 울었다.
그날 처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게 가족일까?
멀리 있어도, 아무 말하지 않아도 아프면 왠지 마음이 움직이는 것.
그런 게 피로 이어진 가족일까?"

 

나는 외로웠지만,  살고 싶었다.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단단하게 살아내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는 굵고 짧게 살 거야. 하지만 후회 없는 삶을 살 거야.”
그래서 나는 지적장애인 시설에서 일했고,
힘든 사람들 곁에 있으려고 애썼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나는 늘 질문했다.
“이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사람을 돕고 있는 걸까?”
“나의 존재는 누군가에게 빛이 되고 있을까?”

 

내 가정사는 어둡지만
나는 늘 의미 있는 방향으로 걷고 싶었다.
그게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 나를 지켜준 작은 희망들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왜 그렇게 아픈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세요?”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본다.
정말 그들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그 속에서 나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는 걸까?

 

메시아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
마치 내가 구원자가 되어야 할 것처럼 느끼는 감정.
어쩌면 내게도 그런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릴 때 내가 지켜줄 수 없었던 엄마.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지만, 나조차도 무력했던 그 상황들.

“내가 더 크고 강했다면 엄마를 지킬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되뇌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힘들어 보이면
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내가 겪었던 그 외로움을 그 사람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하지만 정작 나는 아직도 아픈 사람이다.
다 나은 것도, 강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돕고 싶지만 내 마음이 무너질까 봐
용기 내어 다가가지 못하는 순간도 많다.

그럴 때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네가 지금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그저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걸로도 이미 충분해.”

 

사실 돌아보면
내 삶은 작은 희망들로 여기까지 버텨온 것 같다.

 

어디선가 들려온 찬송가 한 소절,
새벽에 펴놓은 성경의 문장 하나,
아이들이 웃으며 건네는 "선생님, 좋아해요."
지적장애인 시설에서 만난 세상 누구보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들.

그 하나하나가 나를 붙들어준 희망의 불씨였다.

 

나는 누군가를 구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함께 울어줄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울음이
언젠가 그 사람의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왜 살아남았는가_4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반응형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왜 살아남았는가_2  (3) 2025.08.04
나는 왜 살아남았는가_1  (2) 2025.08.04